주민자치

역사적 전개

1. 조선의 향촌자치

조선의 향촌자치는 향약과 상하합계 그리고 촌계로 구성되었다. 향약은 양반이 상민을 교화하여 마을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이념으로 재지사족을 매개로 실현된 규범이나 실패했다. 상하합계는 임진왜란 후 지역사회 내 양반을 의미하는 상계와 상민을 의미하는 하계를 통합하기 위한 시도였으나 양반이 통합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상민들이 지속적으로 반발하게 되었고 결국 양반이 이탈하게 되어 성공하지 못했다. 촌계는 상민들의 근린 자치로 불문율로 운영된 동계로 구성되는데 상민들은 특히 지역사회의 경제공동체인 두레를 조직하게 되면서 한국형 향촌자치의 체계를 구축하였다. 해당 구조는 아래의 표와 같다.

조선의 향촌자치는 오늘날 다음의 세 가지 교훈을 제공한다. 먼저 관료의 개입은 주민자치를 저해한다는 것이다. 수령의 향촌자치 개입이 민(民)에 의한 향촌자치에는 저해가 되었고 이는 향촌자치는 수단적인 가치가 아니라, 향촌자치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녀야 비로소 자치다울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둘째 입조권 등에 결정권을 갖고 있는 권력이 주민자치에서의 영향력을 경계해야 한다. 조선 향촌자치에서 가장 큰 문제는 재지사족(在地士族)이었다. 이들은 신분제 사회에서 우월적인 지위에 있고 특히 사림파 사족들은 도덕적으로 모범으로 향촌사회에 지도력을 있었다. 이들은 향안(鄕案)을 독점하여 향촌자치가 아니라 주민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삼아서 향촌을 양반들의 통치대상으로 만들고 말았다. 향안은 요즈음의 시‧군‧구 의회와 유사하기에 오늘날 시‧군‧구 의회가 주민자치에 대한 입조권 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조선의 양반이 향안을 장악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단체장들이 지위하는 읍‧면‧동장이 주민자치위원회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전권을 가진 것도 관료들에 의한 향촌 지배에 불과하며, 향촌자치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주민자치관련 일들을 관료들이 주관하거나 정치인인 단체장의 측근들이 관련조직을 장악하고 사업을 위탁하는 것도 조선의 향촌자치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과 같다.

셋째 촌계의 사례를 통해 주민들의 자치적인 조직의 성공 가능성이다. 수령이나 양반으로부터 향촌자치의 필요조건인 마을성‧주민성‧자치성을 분권 받지 못하였으나, 주민들은 스스로 불문율로(不文律) 수령이나 양반들의 간섭을 배제하고, 향촌자치의 충분조건인 자발성‧자주‧자율성을 확보하여 향촌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처럼 관료들의 지나친 관심보다는 오히려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방치하는 것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당시 상민들에게는 향촌자치의 필요조건인 분권이 제공되지 않았는데도 향촌자치의 충분조건인 자치를 먼저 구현하였다. 이를 조선의 무능의 결과라 보는 이도 있으나, 향촌의 자발적인 자치, 훗날 민중운동의 기폭제로의 긍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2. 일제강점기

일제는 한일병합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하고 조선을 식민통치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지방행정조직을 1910년과 1914년 그리고 1930년에 걸쳐 총 세 차례 개편했다. 총독부는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朝鮮總督府地方官官制)'가 공포했다. 그리고 해당 칙령에 따라 기존의 1수부 13도의 행정구역을 도(道)․부(府)․군(郡)․면(面) 체계로 변경하고, 13도 12부317군 4,356면을 지정했다. 같은 해 10월 1일에는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의거해 전국 12개 도시, 경성, 인천, 부산, 원산, 대구, 평양, 목포, 군산, 마산, 진남포, 신의주, 청진 등을 12개부로 지정했다.

1914년 개편에는 부제의 정비하고 군•면을 통폐합하면서 전국이 13도 12부 220군 2,522면으로 구성됐다. 1930년에는 또 한 차례 개편을 통해 1917년 시행한 지정면(指定面)제를 폐지하고 군과 면 사이에 읍을 추가했다.

일제는 강점 초기 무단정치를 통해 국가기구를 강화함과 동시에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관료를 임명하여 중앙집권적 근대국가 설립하고자 했다. 그 결과 조선조에 존재했던 지방정치의 상대적 자율성은 약화되었다. 일제는 지배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지방의 한국인 토착지주 세력을 정치적으로 배제하면서도 경제적으로는 포섭하였다.

일제의 통치가 문화통치로 전환되면서 1920년 7월 각 도에는 평의회, 부와 면 단위에는 협의회, 23개 면에는 민선 면 협의회가 구성되는 등 형식적으로나마 지방자치가 제도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지방자치원리 도입은 여전히 중앙의 총독부 권력을 지방수준에서 정당화하여 지역사회에 행정적 침투력을 고양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이는 민족 간 분열을 강화했다.

1930년대 일제는 상층계급의 한국인을 식민통치기구 안으로 더욱 확실하게 끌어안기 위하여 식민지 내 기존의 지방자치제를 강화하였다. 그에 따라 1930년 12월 부와 읍의 협의회에 의결권이 부여되고 관선 면 협의회 회원을 모두 민선으로 바꾸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지방자치제도 개선안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지방의 각종 협의회는 조선총독부 정책에 합치하는 사항을 통과시키는 기구에 불과했고, 자산가나 친일파를 관변(官邊)으로 포섭하는데 활용되었다. 즉, 일제가 지방자치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한 진정한 의도는 지방자치라는 외형을 통해 식민통치를 강화하고 효율적으로 지방행정을 관리하고자한 것이었다. 자연부락의 통합과 읍•면 설치 그리고 반(班)제도 도입을 통해 일제는 국가의 통치를 수직계열화하고 향촌자치의 전통을 말살하여 조선의 지역사회를 완전히 장악했다.

3. 건국•산업화 그리고 민주화 시기

1945년 일제로부터 독립하고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지만 일제의 향촌 지배 체계가 답습되었다. 이후 한국 사회는 산업화 과정을 겪으면서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이 야기되어 도시로 인구가 유출되어 농어촌의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다. 그러나 당시 주민자치에 대한 이해가 무지하여 농어촌은 공동체가 붕괴되었고 도시는 공동체 설립 기반이 형성되지 못했다. 민주화 시기에도 역시 주민자치가 간과되었다.

4. 1999년 이래 주민자치센터

1999년 주민자치센터가 설립되면서 주민자치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나 주민자치센터에는 분권과 자치가 모두 제공되지 않았다. 해당 센터는 조직적인 측면에서 분석했을 때 위원회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해당 조직의 전략, 과정, 보상 및 인력은 모두 부재했다.

먼저 주민자치센터는 프로그램 운영상의 문제를 갖는다. 주민자자센터에서는 읍•면•동 내 2~3개의 강의실에서 평일 낮 시간대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주로 헬스, 노래교실 등 문화여가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월 평균 2만 원 내외의 수강료로 책정되며 주 이용 계층은 두 번 이상 프로그램을 수강한 성인 여성들이다. 주민자치센터의 프로그램은 해당 읍•면•동 주민의 의견조사를 실시하여 주민들이 원하는 프로그램의 내용을 확인 한 후,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선정하고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자치센터의 프로그램이 지역유형에 관계없는 천편일률적인 프로그램의 개발・운영이 되고 있다. 이는 담당공무원과 주민자치위원의 프로그램 기획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하고, 지역자원과 지역욕구에 대한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 지지 않은 결과이다. 또한 읍•면•동 주민자치센터 담당 공무원 근무시간(09시~18시)과 상근 실무인력의 미확보, 취약시간(공휴일・야간・새벽) 프로그램 운영방안 미확보로 인해 이용계층의 대다수가 여성 특히 전업주부라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대부분의 읍•면•동 시설이 열악하지만, 공간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지역 내 각종 시설(학교 등) 연계사업이 저조하여주민들의 다양한 수요를 반영하고 주민자치기능을 활성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의 개설이 어렵다.

둘째, 주민자위원회 구성과 활동의 문제점이다. '주민자치센터의 설치 및 운영조례'에 따르면 주민자치센터의 운영책임자는 읍•면•동장이지만 이는 명목상에 지나지 않고 실질적으로는 주민자치위원회가 운영의 책임을 맡고 이를 담당 공무원이 지원하고 있다. 주민자치위원회는 위원장, 부위원장 각 1인을 포함하여 30인 이내로 위원과 당연직 고문(3인 이내)으로 구성되고 각 분야 별 분과위원회를 두고 있는데 그 구조는 아래 표와 같다.

주민자치 위원은 읍•면•동장에 의해 위촉되는데 대상자는 읍•면•동에 소재하는 각 학교, 통장대표, 주민자치위원회 및 교육・언론・문화・예술 기타 시민・사회단체에서 추천하는 자, 공개모집 방법에 의하여 선정된 자가 대상이다. 위원장과 부위원장은 위원 중에서 호선하며, 위원장, 부위원장, 위원 및 고문의 임기는 대개 2년으로 하되 연임할 수 있다.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수행하는 주민자치 사업의 주요 내용은 읍•면•동 주민자치센터에서 지역공동체 형성, 지역주민의 문화여가 선용, 지역복지 증진, 주민편익 도모, 주민의 교육수준 향상, 지역사회진흥 등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 등이다.

동장이 위촉하는 자치위원은 주민이 직접 선출한 대표도 아니고, 직능별 대표도 아닌 애매모호한 집단으로 지역유지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자치위원들은 역량 부족으로 월례회의에 참석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활동계획 수립을 포함한 대부분의 활동은 읍•면•동 담당 공무원이 주도하고 있다. 해당 위원회는 각 시•군•구 주민자치센터 설치 및 운영 조례를 근거 법규로 활동하는 까닭에 명확한 법적 근거 규정이 없어 상황에 따라 행정기관 또는 민간조직으로 해석되어 자치활동에 많은 제약이 따른다.

또한 주민자치센터는 주민생활지원서비스 전달체계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으나, 주민생활지원과나 담당과는 별도로 시•군•구의 자치행정과나 주민자치과에 소속이 되어 있어서 정책적인 연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특히, 주민생활지원서비스 전달체계상 민관협력조직으로 읍•면•동의 주민자치센터가 매우 유용하지만, 거의 연계되어 활동하지 않고 있다. 아파트부녀회, 새마을부녀회, 리개발위원회 등 주민자치센터와 유사한 활동을 하는 다수의 단체들이 있지만, 제각기 독자적으로 활동하여 활동의 중복과 자원의 낭비를 가져오고 있다.

이처럼 실제 주민자치센터는 동장이 직영하는 사회교육기관이며, 주민자치위원회는 사회교육 프로그램의 심의위원회에 불과했다. 주민자치센터가 주민자치를 하는 센터가 아니게 되고 주민자치위원회가 주민자치를 하는 위원회가 아니게 된 상황에서 결과적으로 주민자치는 심각하게 왜곡되었고 주민자치위원회를 무력화 되었다. 그에 따라 주민자치센터를 통한 주민자치는 처절하게 실패를 하였다고 말할수 있다.

5. 2013 시범실시 주민자치회

주민자치회는 '풀뿌리자치의 활성화와 주민의 민주적 참여의식 고양(특별법 제27조)'을 목적으로 설치된 것으로 읍•면•동에 거주하는 주민 대표로 구성되는 순수한 주민자치기구이다. 해당 특별법의 정식명칭은 2010년 10월 제정・시행된 「지방행정체제개편에 관한 특별법」이다. 특별법 제28조에 따르면 주민자치회가 설치될 경우, 읍•면•동의 행정기능을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수행하되, 관계 '법령, 조례 또는 규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지방자치단체 사무의 일부를 주민자치회에 위임 또는 위탁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주민자치회는 행정보조기관인 통•리 조직이나 행정협력단체인 새마을 등 직능단체와는 차별화된다. 주민자치회는 주민자치위원회의 자치활동을 확대, 강화, 발전시킨 자치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주민자치회가 주민의 대표로 구성된 순수한 주민자치기구라고 하지만, 읍•면•동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민생활과 관련된 일을 행정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처리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앞서 제시한 특별법 제28조를 고려할 때 시•군•구 등 지방자치단체와 주민자치회의 유기적인 협력 관계의 구축이 주민자치회의 성공적인 정착에 필수적이다.

이처럼 주민자치회의 설립은 해당 법안을 배경으로 하는데 추진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이명박 정부는 2011년 2월 16일 대통령 직속으로 지방행정체제개편추진위원회를 발족했다. 이후 박근혜 정부에서도 안전행정부가 주도하여 주민자치조직의 활성화를 위해 『지방분권 및 지방행정체제개편에 관한 특별법』에 과제를 제시하고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후속조치들을 다양하게 모색했다. 안전행정부는 특히 해당 특별법 제27조-제29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읍•면•동 주민자치 활성화를 위한 주민자치회의 효율적인 출범과 정착을 위한 작업들을 순차적으로 전개하고자 했다.

안전행정부는 주민자치회의 시범실시를 통해 문제점 등을 모니터링 한 뒤 별도의 법률의 제정을 통해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이 과정은 세 단계로 이루어졌는데 먼저 제1단계로 공모를 통하여 전국의 31개 읍•면•동을 선정하여 2013년 7월부터 2014년 7월까지 1년간의 일정으로 주민자치회의 시범사업을 추진했다. 제2단계에서는 시범사업 완료 후 시범사업의 성과를 분석하여 주민자치회의 최종모형을 확정하고 주민자치회의 설치와 운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주민차지회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마지막 단계로 2015년 주민자치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주민자치회의 기능은 기존에 주민자치센터에서 수행하던 마을강좌, 마을만들기, 마을 행사 등 주민자치기능과 시•군•구 혹은 읍•면•동의 위탁사무처리기능 등이다. 설치단위는 읍•면•동 단위로 1개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농어촌지역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예외적으로 분회를 둘 수 있도록 하였다. 주민자치회의 운영을 지원하기 위하여 유급사무원 또는 자원봉사자를 둘 수 있도록 했으며, 필요시 지방자치단체에 공무원 파견 요청도 가능토록 하였다. 주민자치회와 주민자치센터와 읍•면•동장과 통•리장 그리고 주민과의 관계도는 아래와 같다.

주민자치위원들은 2년 임기(연임 가능)의 무보수 명예직 봉사자(회의참석 등에 따른 수당 지급)로 20~30명의 범위 내에서 조례로 규정토록 하고 있다. 위원의 자격요건은 당해 읍•면•동에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 주민이거나 지역 내 소재한 사업장 또는 단체 근무자들로 하였으며, 선출방식이나 구성 비율의 결정, 선거관리 등 위원 선출 관리를 위해 읍•면•동 단위로 9명 내외의 '위원선정위원회'를 구성‧운영토록 하였다. 선출방식은 지역대표와 일반주민, 직능대표 등 분야별로 아래와 같이 달리할 수 있도록 했는데, 공개모집으로 선출된 위원이 주민자치위원회 전체를 구성할 수 없도록 제한함과 동시에 성‧연령‧소득수준 등을 고려하여 계층별로 균형 있게 구성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주민자치위원의 선출도 기존의 읍•면•동장의 임명 방식에서 시•군•구청장의 위촉방식으로 변경하였다.

행정체제개편위원회에서는 주민자치회 모델을 한국지방자치학회의 용역을 통해 설계하도록 하고 지방자치발전위원회와 행정안전부와의 토의를 통해 수정했다. 하지만 해당 모델은 행정구역개편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으로 근린자치에 대해서는 간과한 측면이 있다. 첫째, 근린자치단체인 주민자치회를 행정계층인 읍•면•동 지역•계층에 중첩적으로 설치하였다. 둘째, 근린자치의 본 의미에서 읍•면•동보다 작은 자연부락을 우선시 할 수 있으나 제도적 수용의 용이성과 관련법의 내용 등을 고려하여 읍•면•동을 제도 도입의 단위로 했다. 셋째, 수정 과정에서 근린자치의 기본 조직인 통•리•반을 읍•면•동의 관리 하에 두도록하였다. 주민자치회를 주민이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선정위원회가 구성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모델을 바탕으로 시범 실시된 주민자치회는 실제 마을, 주민 그리고 자치가 부재하였다는 측면에서 주민자치를 실현하지 못했다. 해당 조직은 위원회의 구조를 띠고 인력은 승계를 통해 충원되지만 전략, 과정, 보상 측면에서 모두 부재했다. 주민자치회는 명칭은 다르지만 주민자치센터의 조직과 인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시범실시 주민자치회는 주민자치위원회에서의 모순과 실패가 그대로 되풀이되었고 주민자치센터의 실패를 확대 재생산하였다.

6. 2017 서울형 주민자치회

2017년 실시된 서울형 주민자치회는 선행 주민자치센터와 시범실시 주민자치위원회와 비교하였을때 유의미한 진전이 부재했다. 서울형 주민자치회는 주민자치회를 읍‧면‧동에 설치한다고 하여 주민자치회에 대한 앞선 주민자치센터와 시범실시 주민자치회의 근본적인 오류 답습하였다. 또한 주민자치회를 기존의 주민자치위원회와 혼동하는 시범실시 주민자치회의 오류를 가졌다. 인력의 문제에 있어서는 주민자치회 위원을 선정위원회에서 선출하도록 하여 주민에 의한 자치를 관치로 장악하는 주민관치의 문제를 답습했다.

더욱이 주민자치위원의 자격을 주민자치학교 이수자로 한정하면서 위헌적인 문제를 야기하고 있으며, 주민자치회의 위원구성에 대해서도 정원 50명의 60/100은 주민자치학교 이수자 중에서 추첨으로 선정하고, 40/100은 해당 동 소재 주요 기관 및 단체, 기타 동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주민조직 등에서 추천한 사람으로 한다고 하여, 주민자치에서 주민들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주민자치위원의 구성에 있어서도 성별구성 즉, 동성 60/100 초과토록 하는 규제는 법률권장사항이지만, 연령구성 즉, 40대 이하를 15%로 구성하게 하는 규제는 주민의 자율에 맡겨도 좋을 일이며, 주민자치회장의 임기(2년, 단임) 규제9)는 지금까지 읍‧면‧동장이 위촉하는 관제 위원회의 폐해로 주민자치를 불가능하게 하는 독소조항이다.

주민자치회 자치계획도 주민들의 자치가 아니라 행정사무에 협조하는 내용으로만 구성하여서 조선의 향약을 비롯해 주민자치센터와 시범실시 주민자치회의 관치체계를 답습하고 있다. 또한 주민자치회와 단체장의 관계에서 단체장을 주민자치회의 지배적인 위치에 두어 구성원의 교육과 지원 등 관리전반을 맡기고 있으며 주민자치회는 다만 의견 제출자에 불과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주민자치의 요소인 마을, 주민 그리고 사업이 읍•면•동 단위에서 주민이 부재한 상황에서 주민들이 수행할 수 없는 사업이 추진되도록 독려되었다. 분권은 형식적으로 제공되었고 자치는 불가했다. 해당 조직은 위원회의 구조로 과정과 인력 측면에 있어 불명확하며 여전히 전략이 부족하고 보상이 부재했다. 결국 서울형 주민자치회는 주민자치의 혁신의 필요성으로 출발되었으나 주민자치의 기본 요건이 간과되었고 구체적인 방안 탐색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7. 2017 담양형 주민자치회

2017년 담양형 주민자치회는 주민자치 실질화의 필요성 절감으로 시행되어 주민에 근거를 둔 주민자치회 구성에 노력을 기했다. 즉 해당 주민자치회는 주민자치회의 관리능력에 맞도록 마을자치회와 읍•면 주민자치회와 분리되어 구성되었다. 마을자치회는 통•리 단위로 조직되게 하였고 이를 주민들에게 분권하여 해당 조직을 통해 주민들 간 통합을 이룰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하게 하였다. 읍•면 자치회의 경우 주민자치센터와 경영권을 분리하였다.

이처럼 해당 주민자치회는 분권의 실질화를 체감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고 자치 측면에서는 자치직무와 자치인력 간의 연계(match)성이 높았다. 조직 평가에서 마을자치회는 분명한 전략과 명확한 구조와 인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과정이 미흡하고 보상이 부재하였다. 주민자치회 역시같은 결과로 분명한 전략, 명확한 구조 및 인력, 미흡한 과정 그리고 부재한 보상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담양형 주민자치회는 주민자치의 혁신을 절감하면서, 마을자치회는 마을에서 주민들에게 전적으로 분권하고 자치를 지원하기 위해 기획되었고, 주민자치센터를 분권하여 주민자치 실질화에 기여했다.